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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고려 초 高僧碑文의 太祖 관련 서술과 그 성격

 

□ 목차

머리말

 

一. 태조와 관련된 고승들의 비문 현황

1. 고승비문의 현황

2. 후삼국 통일 이후 건립 개시

3. 門徒들의 건립 요청

 

二. 고승에 대한 招致의 이유와 효과

1. 고승의 명성과 인망

2. 고승의 대중 교화

 

三. 고승과의 통일에 대한 의논

1. 통일을 위한 군사 활동과 살생

2. 국가와 불교의 호혜적 관계의 확인

 

맺음말

 

머리말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신라의 분열 이후 지방 세력들이 분립하던 시대상황에서 이들을 통일하기 위해 군사 활동을 펼쳐나갔다. 고려의 군사 활동은 후백제를 대상으로 주되게 이루어졌다. 920년 10월에 있은 후백제의 신라 침공으로 본격화된 군사 활동은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를 격파하며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 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고려는 936년에 후백제를 정복하며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고려 태조는 군사 활동을 하는 틈틈이 당시의 사상계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었다.

당시의 사상계는 불교가 중심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나말여초 대의 새로이 유입된 선종이 전국을 풍미하고 있었다. 태조는 고려 개국이후 고승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력에 모으고, 사찰을 건립하여 도읍인 개경 주변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통일 이후에도 고승들의 비를 건립하는 형태로 계속되었고, 태조 자신도 왕사의 비를 직접 찬술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통일 전쟁의 성과를 불교에 공을 돌리기도 하였으며, 936년에 후백제를 정복하고 그 기념으로 창건한 충남 논산의 개태사의 기고문을 직접 작성하였다. 또한 그가 임종할 즈음에 후대의 왕들에게 경계할 바를 가르친「訓要十條」에는 불교관련 언급이 1,2,6조의 3개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태조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나말여초 시기의 불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연구들은 태조의 생애 동안의 치적들을 꿰뚫고 있다. 물론 태조 본인 이전 대의 가계와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서 태조의 가계가 일찍부터 불교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태조의 불교정책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는 903년 나주를 점령하면서부터 당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승려들과 관련을 맺었던 것으로 보이며과 고려를 건국한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고승들을 초치하여 결연을 맺었으며, 각 종파세력들을 개경에 상주시킬 수 있도록 태조 10찰 등의 사찰을 건립하여 사상계를 후원하고 이를 통해서 민심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태조와 불교계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는 태조의 정책만큼 당대의 불교계에 내부의 사정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당대를 풍미했던 불교계의 조류는 선종으로 이에 대한 연구의 시원적인 성과는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는 김철준이 제시한 나말여초의 시대상인 ‘중세지성’의 기반 위에 서 있으며, 선종의 활동이 나말여초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하여 풀이를 시도하였던 것으로, 사회변동기의 사상의 역할에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교종과의 대비를 통한 선종의 사회 비판적인 기능은 시대사의 한 기준으로도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불교사의 연구가 사회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데 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이후의 연구들은 기존 연구들이 선종을 기존 사회에 반항적인 성격에만 초점을 둔 것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선종의 각 문파들의 연원과 승려들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불교정책에 따른 선종의 양상이 다시 주목되어 고려 왕실의 불교 통제책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당대의 선종에 대한 연구에 주요한 사료로 이용되는 고승비문은 고려 태조대 이후로 고려에서 건립된 것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본고는 이점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는 선종에 대한 연구는 고려 초의 태조의 불교정책과 연결되어 함께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에 과정에는 고승비를 접근이 꼭 필요하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고승비문의 건립이 태조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 몰려 있는 만큼 왕건 대의 고승비문의 건립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고승비문의 서술 경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작업이라고 보았다. 특히 태조의 불교정책이 후삼국 통일을 기점으로 변화하여, 개경 중심의 사찰 건립에서 개경에서 지방으로의 고승비 건립이라는 추이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 점은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 그 추이를 파악한 것이기에 온전한 불교정책의 변화를 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승비문의 내용이 후삼국 통일을 당시 사회의 중요한 기점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통한 접근은 비문 건립의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본고에 이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으로 1장에서는 태조와 고승의 직접적인 만남이 서술된 고승비문들의 현황을 정리하고자 하며 이와 함께 고승비가 건립된 연도별 현황을 분석하여 고승비의 건립조건이 비문 내용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2장에서는 태조가 고승들을 인정하고 자신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을 정리함으로서 국가가 선종의 어떤 특성의 중요하게 인식하였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태조와 고승간의 대화를 중심으로 태조의 통일 및 불교정책에 대한 고승들의 인식 및 고승비문에서 중요하게 서술된 바가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한다.

 

 

一. 태조와 관련된 고승들의 비문

1. 고승비의 현황

고승비라는 명칭 대신에 當代에 건립된 비의 題額에는 塔碑라는 명칭이 많이 쓰였다. 이는 고승의 유해를 안치한 탑과 함께 세워진 비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그러나 명칭 자체는 탑비가 대다수이나, 탑의 유무가 확인되지 않는 비도 몇 개 있으므로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용어로서 본고에서는 고승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국가에서는 생전에 책봉되거나 또는 사후에 추증된 국사나 왕사에게나, 혹은 이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은 승려의 사후에 국왕의 승인 하에 고승에게 諡號와 塔號를 내렸다. 대게 이와 함께 고승의 일대기를 기록한 고승비도 건립을 명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文人에게 비문을 찬술토록 하였다. 고승비의 건립 과정은 일정치가 않아 고승이 입적하였고, 탑이 건립되었는데도 고승비가 건립되지 않아 10~20여년이 지난 이후에 문도들의 요청으로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고승비 건립 과정은 문도들의 건립 요청과 국왕의 인허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간혹 문도들의 건립 요청 없이 국왕의 명령에 의해 진행된 경우도 있었다. 고승비의 건립은 비문의 서술로는 찬술자가 국왕의 지엄한 명을 받들어 삼가 조심스레 짓는다고 하며 국왕과 고승에 대한 추숭이지만, 그 의미는 비문의 주인공인 승려의 문도와 국왕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다.

나말여초 대의 선승들(생몰기간 785~1000?년) 중 비문에 행적이 남아있는 승려들은 모두 31명(872~1017?년에 건립)으로 이들은 모두 국가에서 국사나 왕사의 대우를 받은 승려들로 추정된다. 고승비문 외에도 《祖堂集》과 《景德傳燈錄》에 이들의 행적이 내려오기도 하나, 가장 당대와 인접하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은 고승들의 사후 직후 또는 보통 10년 내외에 건립된 고승비문이다. 고승비문의 현황을 건립년도를 기준으로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표 1> 나말여초 시기에 건립된 고승비 현황

번호

승려

고승비명

찬술자

건립년도

건립지역

1

慧哲

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崔賀

872(경문왕 12)

전남 곡성

2

慧昭

雙磎寺眞鑑禪師塔碑

崔致遠

877(정강왕 2)

경남 하동

3

體澄

寶林寺普照禪師塔碑

金穎

884(헌강왕 10)

전남 장흥

4

利觀

(沙林寺)弘覺禪師碑

金薳

886(정강왕 1)

강원 양양

5

大通

月光寺圓朗禪寺塔碑

金穎

890(진성왕 3)

충북 제천

6

秀徹

深源寺秀徹和尙塔碑

崔致遠(추정)

893(진성왕 7)

전남 남원

7

無染

聖住寺朗慧和尙塔碑

崔致遠

909년 이후 건립

충남 보령

8

道憲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崔致遠

924(경명왕 8)

경북 문경

9

審希

鳳林寺眞鏡大師塔碑

景明王

924(경명왕 8)

경남 창원

10

順之

瑞雲寺了悟和尙眞原塔碑

미상

937(태조 20)

경기 개풍

11

利嚴

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崔彦撝(추정)

937(태조 20)

황해 해주

12

□運

毘盧庵眞空大師普法塔碑

崔彦撝

939(태조 22)

경북 영주

13

麗嚴

菩提寺大鏡大師塔碑

崔彦撝

939(태조 22)

경기 양평

14

開淸

地藏禪師圓郞大師悟眞塔碑

崔彦撝

940(태조 23)

강원 강릉

15

忠湛

興法寺眞空大師塔碑

太祖 王建

940(태조 23)

강원 원주

16

洪俊

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崔彦撝(추정)

941(태조 24)

경북 예천

17

玄暉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崔彦撝

943(태조 26)

충북 충주

18

切中

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崔彦撝

944(혜종 1)

강원 영월

19

慶猷

五龍寺法鏡大師普照慧光塔碑

崔彦撝(추정)

944(혜종 1)

경기 개풍

20

逈微

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崔彦撝

946(정종 원년)

전남 강진

21

允多

大安寺廣慈大師碑

孫紹

950(광종 1)

전남 곡성

22

行寂

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

崔彦撝

954(광종 5)

경북 봉화

23

慶甫

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

金廷彦

958(광종 9)

전남 광양

24

미상,

字 □通

覺淵寺通一大師塔碑

金廷彦(추정)

958~960(광종9~11)년

충북 괴산

25

兢讓

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李蒙游

965(광종 16)

경북 문경

26

燦幽

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

金廷彦

975(광종 26)

경기 여주

27

坦文

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

金廷彦

977(경종 2)

충남 서산

28

미상

鷰谷寺玄覺禪師塔碑

王融

979(경종 4)

전남 구례

29

釋超

智谷寺眞觀禪師悟空塔碑

王融

981(경종 6)

경남 산청

30

智□

葛陽寺惠居國師碑

崔亮

994(성종 13)

경기 화성

31

慧炬

寧國寺慧炬國師碑

미상

1017년(현종 8년) 이후

경기 의정부

 

※ 전거 : 한국사연구회 편, 1996,《譯註羅末麗初金石文 上》, 혜안; 韓基汶, 1983, 앞의 논문, 39쪽.

 

이중 음영표시 된 16개의 비문에 고려 태조와 관련된 서술이 쓰여있다. 1~10번에 해당하는 비문은 신라에 의해 비가 건립된 이들로 그들의 생몰년대 중 제일 늦은 이는 9번의 審希로 그는 923년에 입적하여 고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입적했으나, 비문에는 신라 왕실간의 관계만이 드러난다. 이 점은 그의 본거지가 신라의 영역에 해당하는 김해 일대이고 그의 활동 중 고려 왕실과의 관계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비의 건립주체인 국가가 자신과 관계가 깊은 승려의 비를 건립하려고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고승비는 이 경향에 따라 자국과 관계가 깊은 승려의 기록이 많이 남게 되었다. 한편, 22번의 行寂의 비는 954년에 건립되었으나, 그가 입적한 시기는 916년이며 비가 찬술되시기는 917~924년이기에 고려 태조와 관련된 서술이 없다. 24번의 □通와 28번의 鷰谷寺玄覺禪師塔碑의 경우에는 비문의 훼손이 심하여 태조와 관련된 내용이 남아있지 않아 태조와의 관련된 비문에서 제외하였다.

 

2. 후삼국 통일 이후 건립 개시

고승비의 건립 현황을 보건대, 주목할 점은 고려 태조대의 고승비 건립은 후삼국 통일 이후에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937년부터 활발하게 선문의 고승비를 건립하였다. 특히 태조 대 작성 비문은 8개에 달하여, 그 수효가 고려 왕조 중에 제일 많으며, 그 집중된 시기도 10년여 사이의 빈도가 제일 높다. 고승비의 건립이 많았던 이유는 각 지역에서 선문이 개창되었던 나말여초 시기의 특성이 고려초까지 이어졌으며, 선문들 중 어느 단일 선문이 절대적인 우위를 지니지 않았기에, 그에 따라 태조가 각 선문들의 고승들을 모두 추앙했기 때문이다.

후삼국 통일 기간에 비문이 지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비문을 건립하는 데 소모되는 재정 및 요구되는 인근 주민들의 노역에 대한 불만을 기록하고 있는 비문의 내용을 통해서 후삼국 통일기간에는 재정적인 부담으로 인해서 고승비 건립을 자제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개경에 집중적인 사찰 건립이 이루어지고, 통일 이전에 고려 영토 내의 충주 등의 사찰에 왕건에게 합류한 승려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는 것은 언뜻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재정적인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개경에 사찰을 건립을 할 만큼 중요하게 여긴 점과 함께, 비문의 건립을 후삼국 통일 이후로 미룬 이유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우선 고려 태조 대에 건립된 사찰의 현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표 2> 고려 태조대 건립된 사찰의 현황

절 이름

창건연대

위치와 특징

法王寺

919(태조 2)

황성 안(도내, 북부)

慈雲寺

919(태조 2)

황성 안(도내, 북부)

王輪寺

919(태조 2)

황성 밖(도내, 북부)

內帝釋院

919(태조 2)

황성 안(대궐내)

舍那寺

919(태조 2)

황성 안(도내, 북부)

普濟寺

919(태조 2)

황성 밖(도내)

新興寺

919(태조 2)

황성 안(도내)

文殊寺

919(태조 2)

황성 안(도내)

圓通寺

919(태조 2)

황성 안(도내)

地藏寺

919(태조 2)

황성 안(도내)

大興寺

921(태조 4)

황성 밖(북)

日月寺

922(태조 5)

황성 안(서북)

廣明寺

태조 때

황성 안(서북)

外帝釋院

924(태조 7)

황성 안

九曜堂

924(태조 7)

황성 안

興國寺

924(태조 7)

황성 안(도내, 북부)

妙智寺

927(태조 10)

황성 안

龜山寺

929(태조 12)

황성 밖(북)

安和寺

930(태조 13)

황성 밖(북)

開國寺

935(태조 18)

황성 밖(남동)

廣興寺

936(태조 18)

개경 추정

內天王寺

936(태조 19)

황성 안(도내, 북부)

賢聖寺

936(태조 19)

황성 밖(동북)

彌勒寺

936(태조 19)

황성 밖(중서)

開太寺

936(태조 19)

연산

※ 전거 : 강호선, 2002〈개경의 절〉, 《고려의 황도 개경》, 창작과비평사, 85쪽; 韓基汶, 앞의 논문, 66쪽.

 

위의 <표 2>를 보자면, 태조대에 건립된 사찰들은 통일 이전에 몰려 있는 경향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사찰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이는 태조가 개경을 불교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지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재로서는 태조가 개경을 중심으로 불교의 중심지로 충분히 자리매김하게 했다는 인식하에 통일 이후에는 사찰 건립을 중단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내릴 수는 없겠다. 하지만, 고려 태조가 통일 이후로 각 지방 사찰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는 점과 개경으로의 사찰의 집중에 대해서 그가 훈요십조에서 신라에서 사찰을 무분별하고 지나치게 많이 짓는 폐단을 저질렀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것은 서로 연관을 지어 볼만 하다. 통일 후에는 기존에 존재하던 사찰을 파악하고 그들을 인정해 주되 더 이상의 사찰 건립을 규제하고 자신도 이를 실행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찰 규제를 실시한 것과 함께 고승들의 비를 건립하면서 지방 사찰의 주요 산문들과 결연을 강고히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문도들의 건립 요청

태조와 결연하게 된 불교 세력들은 점차 태조의 영향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말여초의 혼란기에서 자신의 사찰을 보호해 줄 세력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고승비문의 건립과정에 대한 언급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료들이 주목된다.

 

A-1) 바라는 바는 비석의 글을 읽고 임금이 스승을 잃고 한스러워함을 느끼고, 큰 비석을 바탕으로 삼아 문인들이 배움이 끊길 것을 근심함을 탄식하는 것이니

 

A-2) 문도들이 매양 상심하여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알지 못했고, 한스러워하는 것은 입멸한지 10년에 이른 것이었다.

 

A-3) 바라는 바는 서로 도와 향기를 전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며 함께 의논해 경사스러움을 보여 끝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외람되이 표를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글을 임금께 아뢰었다.

 

이처럼 고승비의 건립 비문 중 건립요청에는 스승에 대한 추모와 기념이 주된 이유가 되었다. 문도들은 찬술자를 직접 찾아가서, 비문을 짓는 것을 독촉하면서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문도들이 스승의 비를 짓고자 한 뜻은 간곡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비문을 짓고자하는 이유로 추가되는 것은 바로 시대와 사회의 변화로 인해서 스승의 도가 잊혀질까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B-1) 우리 나라에서 전쟁이 나 먼저 언덕이 골짜기가 되듯 세상일이 빨리 바뀔까 걱정했고, 우리 나라에서 난리가 나서 세월이 가 버릴 것을 문득 한탄했다. 바라는 바는 대사의 말씀을 기록하여 멀리 무궁토록 보여 주고, 오도(吾道)의 조종(祖宗)을 유포하여 길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B-2) 문도 제자 오백 (중략) 푸른 산이 골짜기로 변하고 푸른 파도가 (결락) 이 밭이 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사모하는 정을 드러내어 특별히 비문을 청하였고

 

B-3) 상수 문인들이 다시 조정에 고하여 이르기를, “선사이신 신 모(臣 某)는 다행히 지우를 입어 나라의 은혜가 망극하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두 영화로웠습니다. 그러나 탑 위에 명이 없어 선사 신이 평일에 세운 도행이 점차 사라져 버릴까 염려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임금의 은택을 빕니다.”하니, 비문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문도들은 스승의 가르침이 끊길 것을 걱정하며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스승의 도가 끊길까 서둘러 비문을 짓고자 한다. 그러나 고승비문이 건립된 시기를 미루어보자면, 바야흐로 후삼국의 통일로 사회적인 안정이 도래한 이 때에 무엇을 두고 이들은 두렵고 걱정된다고 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후백제의 영역에 있던 동리산문이 통일 이후에 왕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것을 연관시킬 수 있다. 동리산문은 태조에 대해서 자신들을 稱臣하였으며, 문파의 고승인 道詵을 태조와 관련시켜 왕사와 국사로 추증하게 하였으며 그의 일대기를 윤색하였다. 그렇다면 B-1과 B-2의 표현은 상투적인 비문에서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인 이유를 들자면, 문도 측에서 문파를 유지해 줄 세력을 찾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문도들이 시호를 하사 받고, 탑을 건립해주는 것과 함께 일종의 문서로 된 증거물을 남기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二장. 고승에 대한 招致의 이유와 효과

1. 고승의 명성과 인망

태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당대에 명망을 지니고 있던 승려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903년에 나주를 점령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는 당에서 그곳으로 귀국하던 선승들을 해상 및 도착지역에서부터 쉽사리 자신에게 연결시켰다. 이와 더불어 고려 영토 내의 선사들도 적극적으로 초치하기 위해 서신을 보내며 그들과의 결연에 노력하였다. 태조가 고승들을 초치하기 위해 들였던 노력은 다음과 같다.

 

C-1) 임금(태조)이 대사의 도가 천하에 높고 명성이 해동에 자자함을 듣고, 그를 만나고자 초치하는 서신을 자주 보냈다.

 

C-2) 즉위하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익히 들었으므로 낭관을 보내 왕의 편지를 가지고 산에 들어가 청하였다. ‘덕을 우러러 사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스님의 위의를 뵙기를 원합니다.“

 

C-3) (태조가) 동쪽을 바라볼 때 자주 신령스런 상서로움을 엿보았으니 어찌 며칠을 넘겼겠는가. (강공훤이) 삼가 갖추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금상(고려 태조 왕건)은 대사의 도가 중화에 으뜸이었고 이름이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 높다고 것을 듣고 서둘러 글을 써서 보내어 대궐로 불렀다.

 

C-4) 대사가 중국에서 구름처럼 유학하고 돌아와서 안개처럼 남산에 숨었는데도 근심함이 없이 빼어난 경관에서 지리를 펴 복을 천하에 쌓았다는 것을 들었다. 태조는 이에 맑은 바람을 바라보고 하얀 달을 멀리서 쳐다보듯, 서둘러 서신을 보내 왕경에 오도록 했다. 대사의 훌륭한 모습을 보고 귀로써 대사의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태조는 고승들의 명망이 높다는 것을 듣고 그들을 적극 초청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적극 초청하려고 한 이유는 학문적 성취보다는 사회적인 명망을 지녔다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승들의 비문의 내용도 이와 연관이 있어서, 그 구성의 분기점이 되는 것은 바로 위의 초청에서 부터라 할 수 있다.

 

題額, 撰者, 書者

도입

가계와 탄생연기

출가, 수행

중국 유학

귀국 및 교화

입적, 입비 과정

입비 시기, 각자

陰記

<표 3> 고승비문의 구성도

※전거 : 한국역사연구회 편, 1996《譯註 羅末麗初金石文 上》, 혜안; 정병삼, 2000, 앞의 논문, 16~17쪽.

 

비문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부분인 序의 도입에서 중국유학까지는 해당승려가 이어받은 법맥과 신이한 출생 그리고 수학과정에 대해서 해당 승려가 갖추고 있는 불교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서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귀국교화에서 입비과정에서는 왕과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승려의 학문적 이해와 위상보다는 국가와의 친연성과 교화적 능력에 서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이 이루어 진 것은, 전반부에서는 문도들이 강조하고 싶은 승려의 뛰어난 법맥과 신통력이 주로 서술된 반면, 후반부에서는 승려가 본격적으로 명성을 갖추고 나라에서 활동하면서 그에 따라 비문의 찬술 주체인 왕실과 연관을 맺게 되었고, 왕실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서술 층위가 둘로 나뉘는 것은 비문과 관계된 두 세력의 요구를 적절하게 반영할 수 있는 부분에서 그 최고의 효용을 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태조가 당대의 고승들의 학문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D-1) “어찌 임금께서 선사는 동산법문의 가르침을 베푼 홍인의 7대 손이요 법응대사(심희)의 제자로 높이 열고 잘 유인하여 널리 미묘한 법어를 설하니 부처를 배우려는 무리가 때때로 구름처럼 모여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위에서는 태조가 고승을 초청하게 된 동기로서 해당 고승의 뛰어난 설법이 뭇 사람들에게 감화를 일으켰다고 서술하였다. 이는 고승의 법맥을 강조하고, 그의 설법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는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고승들에게 사람들이 모이며 열렬하게 반응을 한 이유로는 설법이 지난날 교종의 설법과는 다른 측면이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태조가 이들을 초청하게 된 이유는 태조가 그들의 설법에 종교적으로 귀의했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대중적 지지가 보다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태조의 초청을 많은 승려들이 받아들였으며, 태조는 몇몇 승려들에게는 “직접 세 계단을 내려와 경건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국사로 대우”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에 대해서 고승들도 호의적으로 반응하였다.

 

E-1) 대왕(왕건)께서 대사가 근래 오월로부터 새로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니, 마니주가 바다 끝에 숨은 것과 같고, 아름다운 구슬이 하늘 밖에 감추어진 것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편지를 띄우고, 곧 도의 장대에 몸을 굽혔다. 대사가 거센 파도를 움켜 제압하고 사나운 물결을 바람 타고 달리듯이 가서

 

E-2) 대사가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솔토에 거주하는 자가 감히 윤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임금을 뵙게 되면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부촉이 있기 때문에 나는 장차 개경에 가려 한다.”했다.

 

E-1에서처럼 고승은 태조의 초청을 곧 바로 응했으며, E-2에서처럼 왕의 영토에 사는 자로서 어찌 왕명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임금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국정과 민생 등에 대한 질문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상과 준비는 당대에 교종과 선종이 서로 양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새롭게 유입된 선종 승려들도 기존에 교종 승려들이 왕실과 관계를 맺으며, 왕실에서 질문하고 요구하는 국정과 교화에 대해서 그들도 그 기능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들도 그것을 수행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들의 신망은 후삼국 통일이 가까워지고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F-1) 상인들도 절로 데려와 쉬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절로 돌아오게 하였다. (중략) 비록 산 가운데서 조용하고 묵묵히 지키고 있었지만, 역내에서는 맹렬한 위세를 보이셨고, 마귀들을 누르는 기술을 은근히 떨치셨다. 돕고 다른 공을 널리 펴서 마침내 개미처럼 모인 흉악한 무리들과 뱀처럼 달아난 역당들을 우매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바꾸었고, 강폭한 마음을 갖지 말게 하니, 점점 다투려는 마음을 없애고 각각 편안하게 살 것을 기약했다.

 

935년에 兢讓은 자신의 문파의 본거지인 봉암사를 재건하였다. 이 때에 긍양은 아직 태조와 결연하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상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절로 모였으니, 당시의 사찰은 전쟁 통에 지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자, 재화와 인력이 결집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여기서도 흉악하고 강폭한 무리들을 교화하였다 한 것을 볼 때에, 이들이 대항한 세력은 긍양이면서 또한 비문 찬술세력인 고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바로 고승들은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인적 결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지역을 안정시키는 점에 주목하여 그들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2. 고승의 대중 교화

선승들은 지방에서 활동했을 때처럼 고려 태조의 주변에서 거처하면서도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비문에서는 이러한 고승의 교화 활동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G-1) 교를 내리어, 개경 서북쪽 해주의 남쪽에 영봉을 선택하여 정사를 짓고, 절 이름을 광조사라 하여 거주하기를 청했다. (중략) 그 무리들이 삼대와 같이 많았고 그 문이 시장처럼 붐볐다. (중략) 하물며 가까이는 해당군(해주)으로부터 옆으로는 인근 주들까지 모두 깊은 마음을 발하여 깨끗한 행위를 닦으니

 

G-2)[임금께서] … 멀리 남방으로부터 북쪽 경계에 와서 의례하고, 거듭 소백산사를 고쳐 그 곳에 머물기를 멀리서 청했다. 대사가 갑자기 조칙을 받드니 원래 품은 간절함과 은근히 부합하였으므로, 문득 욱금(몸)을 옮기니 바야흐로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부응했다. 겨우 절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벼와 삼이 줄을 이루듯 모여오므로

 

G-3) 당주(當州: 충주를 말함)에서 풍문을 듣고 기뻐하여 이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대사가 잠시 수레를 멈추고 얼마 후 선탑을 펴니 사방에서 오는 자가 모두 작은 집을 가득 채우고 늘어선 모양이 벼와 삼 같았는데 대사는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G-4) 서울 내에서 … 문득 귀산선원을 … 주지하기를 청하였다. (선사는) 이 날 잠깐 동안에 절에 이르러 바야흐로 수레를 멈추니 배우는 사람들이 비오듯 몰려와 그 많은 모양이 마치 논에 서 있는 벼 줄기와 삼밭에 서 있는 삼대와 같이 빽빽하였고 오는 자들이 신선처럼 달려오니 줄이 늘어선 모양이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길 정도로 많았는데…

 

주변의 무수한 대중들이 선승에게 귀의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비문이 고승의 추숭하는 것이라는 성격상 이러한 표현에는 과장이 적지 않게 들어있겠지만, 실제로 선승의 영향력이 어떠하였는가를 떠나 이러한 서술은 왕실이 선승을 통해서 대중들을 규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였고 이를 높이 샀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태조는 그들을 자신의 근거지인 개경인근이나, 지역의 거점인 충주 등에 그들을 거주케 하였다.

교화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서술로도 나아갔다.

 

H-1) 진실로 자비로운 종지의 담장과 해자였으니, 뭇 중생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었고 ...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의왕이 되었다.

 

H-2) 가을 7월 염주와 백주 두 주의 땅이 메뚜기 떼로 농사에 피해를 입었다. 대사가 법주가 되어 대반야경을 강설하니 한 마디 겨우 법을 연설하자마자 온갖 벌레들이 더 이상 재앙이 되지 못했다. 이 해에 풍년이 들어 도리어 만물이 태평해졌다.

 

이처럼 고승들의 교화는 대중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주는 것으로 인정되어 극찬을 받았다. 또한 그들의 신통력은 메뚜기 떼의 병충해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해주고 풍년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니, 이는 고승들의 행적이 비문에 새겨질 만큼 의미가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화는 국가에 있어서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태조가 고승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묻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I-1) 짐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어지러움을 구하고 폭군을 베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늘의 물음을 잊지 않으신다면 나라가 매우 다행일 것이며, 백성들에게도 지극히 다행일 것입니다.”

 

I-2) 대사에게 물었다. “과인은 어려서부터 무에 전념하나라 학문을 정밀히 하지 못하여 선왕의 법을 알지 못합니다. (중략) 영원토록 향화의 공을 닦고 자자손손 끝까지 받들어 모시는 지극함을 표하고자 합니다.”

 

태조는 자신이 부족하여,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올바른 법도를 행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잇다. 이러한 질문은 왕으로서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면 고민하여야 할 당연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당시 나라를 태평하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은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고승에게 한 것은 구태여 승려에게 스승과 제자의 예를 갖추어 선정의 실시에 대해서 여쭙는 의례적인 일이자, 불교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교화 및 선업을 이끌어내자는 것으로 보인다.

 

三. 고승과의 통일에 대한 의논

1. 통일을 위한 군사 활동과 살생

태조의 통일 정책에 대한 불교계의 인식을 나타내 주는 것은 고승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고승들에 대한 기록이 극히 소략하기 때문이다. 세가의 경우에는 해당 왕대에 있었던 국사나 왕사의 책봉 및 그들의 입적에 대하여 서술되어 있는 정도에 그치며, 열전에서 당대에 활동했던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불교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이마저도 조정에서 정책을 정하는 선에서의 이야기에 그친다. 따라서 고승의 통일에 대한 의견을 직접 제시한 것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문헌사료에서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고승비문에 담긴 태조와 고승의 대화는 주목할 만 한 것이다.

당시는 무력으로 지방을 점령 또는 장악하고 장군이나 왕을 칭하던 때라, 세력 간의 군사적인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태조는 고승들에게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희생과 무력 충돌에 대해서 자문을 구한다.

 

J-1) 다른 날 한가한 저녁에 선사를 방문하여 물었다. “제자가 스님의 인자한 얼굴을 대하고 평소 품은 바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나라의 원수가 점차 어지럽히고 이웃한 적이 번갈아 침략하니, 초한이 서로 버티고 있는 것과 같아 자웅의 겨룸이 끝나지 않은 것이 36년이나 되었습니다. 항상 두 흉악한 무리가 있어 비록 호생지심이 간절하나 점차로 서로 죽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과인이 일찍이 부처의 경계함을 배웠으므로, 가만히 자애로운 마음을 내고자 하나, 장난질하는 흉악한 도적의 참담함을 남겨 몸이 위태로워지는 화를 부를까 두렵습니다. 대사께서 만리길을 사양하지 않고 와서 삼한을 교화하니, 곤강이 모두 불태워짐을 구할 좋은 말을 기대합니다.”

이 대화는 태조가 인식하고 있는 후삼국의 정황에 대한 언급이 비교적 자세하게 쓰여져 있다. 태조의 질문을 살펴보자면 태조는 자신과 대립하고 견훤과 같은 흉폭한 무리들을 그간에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앞으로는 화를 초래할 것만 같으므로 그들을 치려고 한다. 그러나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한 살생을 일으키고, 이러한 희생은 불교에서 말하는 악업을 쌓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태조의 질문의 요지이다. 태조가 불교에 대한 신심이 지극하여서 살생을 최대한 금하고자 하는 질문을 이처럼 하였을 수도 있겠으나, 이 질문은 앞으로 있을 군사 활동에 따른 희생으로 인해서 불교계가 반발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라고도 할 수 있다

태조는 신하인 崔凝과의 대화에서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만들고 드디어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이제 개경에 7층탑을 건조하고 서경에 9층탑을 건축하여 현묘한 공덕을 빌어 여러 악당들을 제거하고 삼한을 통일하려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발원문을 만들라”고 한 것처럼 불교가 통일에 기여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는 만큼, 고승과의 대화는 단순히 불교관에 대한 질문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념이 자신의 행위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태조의 질문에 대하여, 고승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K-1) 무릇 도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일에 있는 것이 아니며, 불법은 자신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과 필부는 닦는 바가 각자 다르지만, 비록 군대를 움직이더라도 또한 백성을 어여삐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은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는 것이니, 어찌 죄가 있는 무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함이 (중생을) 널리 구제하는 것입니다.

 

고승은 태조의 통일 정책에 대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태조는 무력을 동원한 전쟁에 대한 부담을 덜고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수행한 것은 전쟁에 대한 전략적 조언과 함께 살생에 대한 병사들의 심리적 불안을 해소하고, 점령지역에서의 반발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승려가 태조의 군사 활동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태조는 승려들의 군사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어, 태조가 신라 외경지역에서 후백제와 전쟁을 할 때에, 각 요처에서 승려들을 협조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태조는 자신에게 협조한 사찰에게는 적극적인 후원을 하며, 그 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한편 태조는 고승과의 문답 후 고승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 죽을 죄를 구해 주고 때로 형벌을 늦추고 우리 가엾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도탄에서 구출하니, 이것은 대사의 원대한 교화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고승의 의견을 묻고 실천하는 데에 주요한 이유로 드는 표현은 바로 ‘교화’이다. 본고의 二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고승을 초치하는 배경으로는 당대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고승의 인정이 그 역할을 하였다. 태조는 고승들의 이러한 인정을 통해서 당대 대중들의 지지를 얻고 통일 사업을 무리 없이 진행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국가와 불교의 상호적 관계의 확인

태조는 통일 후에도 통일 이전처럼 나라 안의 덕망 있는 이들을 모아 민심을 규합하려고 하였다. 특히 이때에 후삼국 통일에 따라 그 영역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L-1) 다섯 인도를 모방하여 불교의 장식을 더욱 숭상하였고, 네 문을 열어 영웅과 현자들을 불러모았다. 이에 도인들이 폭주하고 선승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어른에게 받은 은덕의 종지에 대해 다투어 논하였고, 태평스런 일을 높이 찬양하였다.

 

L-2) 이 때 두 적은 얼음이 녹듯 하고 삼한은 안개가 걷힌 듯 하였으므로, 먼저 흉악한 무리를 없앤 책략을 경하하고 다시 성인에게 하례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L-3) 태조가 바야흐로 온 나라를 통합하려고 불교를 공경하여 숭배하였다

 

이는 「훈요십조」에서 삼한통일을 불교의 공덕이라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통일에 앞서 각지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그 지역의 세력가들을 영합하려한 것처럼, 이제는 통일된 전국토에서 고승과 명망 있는 자들을 초청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초청에는 예전과 다른 면모도 보이고 있었다. 이전에는 수차례 서신을 보내어서 그들을 불려낸 것에 비해, 이제는 그들이 먼저 태조를 찾아왔다.

 

M-1) 이 때 대사는 조서를 기다리지 않고, 절에서 나왔다. (중략)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경스럽게 대하여 법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물었는데 응대하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 (태조는) 대사를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봉암사의 긍양의 경우, 일찍이 신라 왕조와도 결연을 맺었으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 이후에는 개경으로 찾아와 태조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그의 방문에 대해서 태조는 극진히 대접하고 있으니, 통일 이전에 관계가 없던 이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세력으로 적극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의 만남에서 태조는 국가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N-1) 법이 나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닙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대사께서는 안심하고 도를 생각하여 오랫동안 중생을 지켜주십시오. 제자는 법성을 위하여 담과 구덩이가 될 것이며 절을 지키는 견고한 성과 연못이 되겠습니다.”

 

국가와 불교와의 호혜적인 관계는 이미 예부터 익히 알려진 말이며, 그 말은 참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와의 호혜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도 고승이 이에 대해서 “어진 임금의 큰 서원은 호법으로 마음을 삼는 것입니다. 멀리 외호의 은혜를 베풀어 길이 창생의 복을 쌓으소서”라고 한 것처럼 선승들은 이를 태조와의 만남에서 강조하고 있었다. 태조 또한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불교를 외호하는 성과 해자가 되고, 불교는 그 성과 해자 안의 중생-백성들을 교화하며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이를 재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호혜적 관계에서 고승은 1장의 3절에서 언급한 병화와 초적으로부터의 방어 및 사찰의 유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태조의 통일 이후의 정치에 합류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학문이 성글고 아는 것이 얕아 전에 명이 내려졌을 때에는 숨어 있으려는 데에 뜻이 있”었다며 자신의 학문이 부족함을 이유로 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일찍이 태조에게 존숭을 받은 승려에게도 보여서 태조가 직접 비문을 찬술한 玄暉의 경우 후삼국 통일 직후에 올린 表에서 “중이 오가는 것을 꺼림은 뜻이 도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여 승려로서 본분 또한 중요하 것이기에 태조에게 자주 나아가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왕을 만나 존숭을 받았고, 국사와 왕사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고려와는 무관하게 불교계에서 자리매김할 수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고려 초 태조가 건립한 비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 중심에 태조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의 고승비 건립은 그 수효나 건립년도에서 태조의 후삼국 통일 이전의 불교정책이 개경을 불교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는 점에서 후삼국 통일 이후로는 전국토를 대상으로 하여 지역을 규제하고 포섭하고 위한 것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고승비에 서술된 태조 관련 서술은 바로 태조의 불교정책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서이다. 고승비문의 전반부는 비문의 주인공인 승려의 출생과 수학과 같은 개인적이며 사상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만, 그 후반부는 왕실과의 관계가 중점이 된다. 이 후반부의 시작은 국가나 왕이 승려의 명망을 듣고는 그를 초청하여 자신의 주변에 두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왕은 승려의 명망과 민심의 집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고승을 통해서 본거지와 지방의 핵심 지역들의 대중을 안정시키며, 교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고승들은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군사적인 고문 역할을 수행하였고, 불가피한 살생을 일으키는 군사 활동을 사상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 결과가 태조의 군사 활동은 불교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이러한 점이 「훈요십조」의 1조에까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와 불교의 호혜적인 면모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서술의 주체가 국가인 만큼, 국가와 왕이 서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승의 문도는 이러한 정책에 따라갈 수 밖에 없는 면이 크게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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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 高僧碑文의 太祖 관련 서술과 그 성격.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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